설교문
"모세의 지팡이"-2025.05.10 봄학기 목신원 예배
- 작성자
- 부속실
- 등록일
- 2025-05-22 17:39:02
- 조회수
- 1740
- 첨부파일
모세의 지팡이
2025.05.10.
2024학년도 봄 학기 목회신학대학원 토요에배
말씀: 출애굽기 4:1-14
설교자: 유경동 총장
예배 자리 가운데 나온 여러분에게 주님의 복과 평안이 함께 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지난 1월 그리스·터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일정 중 이스탄불에 있는 톱카프 궁전에 방문했을 때 모세의 지팡이로 추정되는 약 3600년 된 지팡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보통 모세의 지팡이를 상상해보면 모세의 키 보다도 훨씬 더 크고 장대한 위엄을 뽐내는 자태를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본 모세의 지팡이는 짧고, 작은 싸리나무와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 모세의 지팡이를 보며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이 이 지팡이를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이 나무 지팡이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무 지팡이와 다른 점은 ‘누구 손에 붙들렸었느냐’일 것입니다. 즉 지팡이의 쓰임은 그 지팡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성경을 통해 두 가지 큰 관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적 사고입니다. 구약은 주로 히브리적 사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와 상징, 공동체가 주를 이룹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났을 때 말씀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 개념 또한 상징, 특별히 ‘공동체적 상징’이 드러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희랍적 사고입니다. 보통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와 분석,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세계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논리와 분석으로 접근한다면 이런 사고가 드러납니다. ‘젖, 얼마나 많은 소를 소유할 것이냐’, ‘꿀, 얼마나 많은 숲 지가 있느냐’ 사실 ‘젖’이라고 한다면 갓 태어난 아이에게 전하는 어머니의 생명수, 즉 사랑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희랍적 사고에 근거했을 때 흔히 그런 개념이 먼저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논리적이고, 수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기 쉽기 때문에 공동체적 사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에 입각하여 본다면 꿀의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노동을 나누고 그 노동의 대가를 자기 소유로 삼지 않는, 이러한 이야기와 상징과 공동체로 충만합니다.
성경을 볼 때 이 두 사고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되지만 자칫 잘못하면 우리에게 성경을 보는 시야가 협소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내가 지금 목신대에서 공부하는 것, 목사가 되는 것 또 나중에 학자가 되는 것 아니면 사역자가 되는 것이 ‘How, 어떻게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Why, 왜 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볼 때에도 저에게도 두 가지의 이념이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저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을까?’, ‘어떻게 저 지팡이가 뱀이 됐을까?’ 이는 물론 잘못된 사고는 아닙니다. 이것은 희랍적 사고입니다. 반면 히브리적 사고는 ‘홍해를 가르신 분이 누구인가’,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희랍적, 히브리적 사고를 통한 믿음 모두 중요합니다.
우리는 논리와 목적 사이에서의 균형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4장 18-19절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이들은 어부, 전문가입니다. 고기 잡는 법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이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바로 목적이 바뀝니다.
이렇듯 예수님과의 만남은 철학과 개념과 자기가 보는 세계관을 바뀌게 합니다. 고기를 낚는 데 있어서 전문가이지만 이제 고기를 낚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동안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그 인생의 목적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원우님들에게 제가 하나님을 향해 가진 질문을 함께 공유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적인 분인가 아니면 하나님은 내 인생을 위해서 내가 짜놓은 프로그램과 계획에 의해서 쫓아다니시는 분인가’ 우리 주님은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같은 교회의 목사님들 나눈 Q.T 내용이 있습니다. 제목은 “이상한 어부 마을”입니다. 이 이상한 어부 마을에는 유치원도 있고, 노인정도 있습니다. 심지어 대학교에 신학과와 철학과도 있습니다. 어부가 되는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고 어떻게 어부가 될 수 있는 지도 설명해줍니다.
앞서 언급했든 이 마을에 붙은 수식어는 ‘이상한’입니다. 이상한 어부 마을입니다. 왜냐하면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알고 사명에 대해 배우지만 마음깊이 이해하고 몸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논리적 이해에서 멈춰 믿음의 갈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보면 믿음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으니라” 하나님이 부르셨기에 여러분이 대학원에서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졸업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이후 좋은 목회자, 선교의 비전, 직장 속에서의 사역자 등 저마다의 물리적인 목적은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왜 나를 선택하셨는가’, ‘어떻게 나를 이끄실 것인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한 자루의 싸리나무 막대기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닌 연약한 손, 말도 제대로 못하는 모세를 선택하셔서 쓰셨던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우리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이상한 신학대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본질적인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져야 합니다. 애쓰고, 노력하고, 땀 흘리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그 목적을 가지고 믿음의 싸움에서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우리 목신대 원우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담당부서 :
- 부속실
- 전화번호 :
- 02-361-9200